02. 낭만
2011년 8월 2일
잤는지 안 잤는지 애매한 밤이 지나갔다.
아침 7시다.
그렇지만 오늘은 8월 2일. 여름의 절정.
당연히 해는 벌써 거의 중천이다.
정말 덥다. 푹푹 찐다.
빨리 씻고 싶다.
마침 역에 샤워실이 있었다.
“얼마에요?”
“45쿠나” [9000원]
...집어치자. 샤워실에 9000원을 내라고?
한국에서 온천물에 목욕하는 게 5000원이다, 이것아.
2000원이나 3000원 정도면
계속 역에서 노숙생활 하면서 빵과 우유로 연명하려 했는데 이건 좀 안되겠다.
노숙으로 연명해도 몸, 특히 엉덩이는 꼭 씻어줘야 한다.
이미 스웨덴에서 욕창으로 호되게 수업을 치른 뒤다.
그땐 친구가 재워 준 덕에 돈 안들이고 요양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몸 만들려면 호스텔 비에 약값 들어간다.
낌새가 올라오면 하루라도 들어가서 자야 한다.
아니, 씻을 곳을 찾아야 한다.
호스텔 가격비교 사이트를 한 번 봐야겠다.
어제 찾아봤을 때에는 죄다 150쿠나 [30000원] 이상이고,
방도 없어서 못 들어갔지만,
검색해서 좀 싼 곳이 나오면 찾아들어갈 의향은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되야 검색을 하지...
노트북이 있는데 PC방 가기는 좀 돈아깝잖냐?
지나가다 있던 빌딩에 [WiFi 무료]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진짠가? 테스트해보니 신호가 정말 강하게 잡힌다.
바로 들어가서 검색해 보았다.
이곳은 화장실과 인터넷 인심이 야박한 이곳에 한 줄기 빛과 소금 같은 존재였다.
백화점 같은 빌딩이었는데,
화장실과 와이파이 무료개방이다!
일단 얼굴의 기름기를 닦아냈다.
잘 곳도 찾았다. 60쿠나짜리 [12000원] 호스텔이다.
호스텔이긴 한데
방에서 자는 게 아니라
앞뜰에 텐트를 치고 자는 조건으로 싸게 재워주는 곳이었다.
아까 샤워실 값에서 3000원만 더 내면
와이파이 무제한에 샤워실, 그리고 아침까지 나오는 곳이다.
대박이다!
자그레브에서는 별로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자전거로 그저 3시간 돌고 왔다가
심하게 더운 점심때에는 낮잠을 좀 자고,
밤 8시쯤에 다시 나가서 야경을 좀 보고 들어오면 끝이었다.
오스트리아 까지는 쉥겐 조약 때문에
날짜를 따지느라 머리에 쥐가 났었는데,
그런 것에 상관이 없는 여기는 정말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늘어지고 있다.
긴장이 마구마구 풀어지니 여행도 마구마구 풀어진다.
40도 가까이 되는 더위에
엿가락처럼 늘어진 멘탈로 호스텔에서
와이파이 전파나 빨아먹고 있던 오후,
오랜만에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옛날에 이미 크로아티아를 왔다 간 친구다.
“흐르바츠카! 여기서 마음의 위안을 많이 받았지!”
“여기 뭐 볼 거 지지리도 없더만 무슨 마음의 위안이야?”
“내가 받았으면 받은 거야.
여행에 지쳐갈 무렵에 여길 왔는데 뭔가 따스하게 날 감싸주더라고.”
그러냐? 나한텐 그저 볼 거 없고 지루한 도시인데.
한 번 나도 이곳에서 위로 좀 받아 보자.
대낮에 중앙역 앞 정원으로 갔다.
말을 탄 우람한 장군상이 건드리지 못할 기백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알고 보니 크로아티아 건국의 왕, 토미슬라바 왕이다.)
그 뒤로는 꽃들이 아주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역 중앙광장. 토미슬라바 장군상
광장에서 좀만 걸어가면 있는 꽃밭
잔디밭 가운데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 그대로 벌러덩 누워버린다.
앞에는 정원, 밑에는 잔디, 위에는 해와 나무가 있다.
그리고 옆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통기타를 들고 빙 둘러 앉아 노래를 부른다.
마치 7080 옛날 우리네 대학생 분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옆에 막걸리라도 하나 있으면
딱 그 당시 내가 상상하는 한국의 낭만적인 대학생과 다를 것이 없었다.
정말 저런 걸 보면 내 인생에서 낭만을 부리고 살았던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선생님들은 대학만 가면 고생 끝이니 지금 시간과 몸과 마음을 갈아 넣으라 하셨다.
그 말만 철썩같이 믿고 내 온 몸 다 갈아 넣어 대학에 갔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는 건 통기타와 알콜로 이루어진 낭만이 아니라
죽어라 공부만 하는 사람들 가운데
목적도 모르고 다시 내 시간과 몸을 갈아 넣는 노동이었다.
정말 내 스스로가 불쌍했다.
하지만 난 약과였다.
내 주위의 후배들은 2학년째부터 일치감치 고시의 세계에 뛰어 들었고,
친구들은 돈을 위해 꿈을 버리고 현실을 택해 간 경우도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는
1학년 신입생이 벌써 고시 스터디에 들어간다는,
전 인류사상 있어서는 안 될 폐륜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하는데 말이다,
내가 아는 아픔은 사랑이나 도전 등을 하다 실패했을 때의 아픔이지,
또다시 몸과 시간을 갈아 넣어 생기는 이런 아픔은
내가 아는 그 청춘이 아니다.
저 모습...
크로아티아 학생들의 낭만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계속 자기들은 살기 어렵다고 징징대지만,
이들의 표정을 보면 아직 찌들지 않았다.
순수하다.
대학의 낭만이 아직은 살아 있고, 아직 이들의 사회는
이들에게 ‘아픔’을 느낄 시간을 줄 여유가 있으며,
‘아픔’과 방황 후에 현실에 뛰어들어도
아무런 색안경 없이 따스하게 받아준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이 정도면 충분히 고통스럽다.
하지만 사회는 우리에게 대학 4년마저 아프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이제는 밥벌이 자리를 갖기 위해 몇 년 더 아파야 한다)
하지만 전혀 건설적인 아픔이 아니다.
그것도 모른 체 우리는 사회로 들어간다.
그리고 옛날에 느꼈어야 할 그 건설적인 아픔을
그제야 느끼려고 한다.
하지만 윗세대에서는
그런 아픔을 이제야 느끼면 어떡하냐고 다그친다.
늦었다고, 이제는 그런 고민은 사치라고 한다.
그리고 한 달 평균 88만원을 받고 불만없이 일하게 만든다.
잘못하면 나도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인생에 답은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저 길은 명백한 오답으로 보였다.
어떻게 보면 난 사회의 순리를 거스르면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1년이란 세월을 날리고 있다.
(사실 1년은..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군대도 갔다 와서 이미 친구들보다 2년은 늦어버린 판인데 말이다.
(대부분의 친구는 전문연구요원으로 가서 군면제를 받고
이제 박사 호칭 받아 나오시는 중이다)
하지만 쓸데없는 아픔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쉬고 싶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못 했던 것을 마음껏 해보면서 커 보고 싶었다.
그때 겪는 아픔은 진정 나를 위한 아픔이라 믿는다.
대낮에 잔다밭에 대자로 뻗어 자는 낭만.
나를 갈아넣느라 한 번도 맘 편히 못해본 일이다.
언제 또 해보겠냐? 뻗자!
다들 자그레브 들어오면 사진찍고 가는 성 마르코 성당
자그레브 오버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가면 무조건 먹게 될
체바치치Cevacici 혹은 체바피Cevapi
구운 빵, 손가락 고기완자, 그리고 양파와 같이 먹는다
체바치치Cevacici 혹은 체바피Cevapi
구운 빵, 손가락 고기완자, 그리고 양파와 같이 먹는다
<이전 포스팅>
CHAP2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CHAP2_01 크로아티아 - 안녕, 쉥겐 | 90일 제한시간으로부터의 탈출 | 도착하자마자 노숙하기
CHAP1 런던, 노르웨이, 스웨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독일, 오스트리아
CHAP1_47+48 오스트리아 - 잘츠부르크 길바닥에서 궁상떨기 | 민박집 사장님 인생은 파란만장 | 유럽사람들이 중국인을 싫어하는 이유
CHAP1_46 오스트리아 - 음악축제 보고 싶은데 양복이 없어요 | 잘츠부르크 음악축제를 가보기 위해 양복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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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1_42 독일 - 로만틱 가도에 서다! | 전독일 청소년 합창대회 | 뷔르츠부르크에서부터 다시 노숙의 길로
CHAP1_41 체코 - 프라하에서의 평범한 나날 2 | 뭉치면 시끄러운 한국 사람들 | 해부에 능한 전주자매들 | 희극인들
CHAP1_40 체코 - 프라하에서의 평범한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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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1_16 잠시 동안의 탈린 나들이, 그리고 안녕
CHAP1_15 웁살라, 너와 같은 하늘 아래
CHAP1_14 아직은 ... 말할 수 없다
CHAP1_13 그녀를 만나기 12시간 전
CHAP1_12 욕창 터지고, 기차에 실려 가고
CHAP1_11 배낭을 털리다
CHAP1_10 사람의 따뜻함을 느끼다 + 노르웨이의 자연에 호되게 데이다
CHAP1_8 한국영화 많이 컸네? + 9 첫 주행, 첫 노숙, 첫 봉변
CHAP1_7 이런 곳에도 한국사람?
CHAP1_5 첫 주행 + 1_6 북한도 자전거로 달린다고?
CHAP1_3 + 1_4 Bryan Almighty + 자전거의 운명은?
CHAP1_1 + 1_2 인천 출발 + 히드로 도착
CHAP0 준비
CHAP0_번외 가져갔던 장비 일람
CHAP0_6 출국 그리고...
CHAP0_4 자전거 맞추기 + 5 쉥겐조약
CHAP0_3 항공권과 장비 마련하기
CHAP0_2 어디를 어떻게 가볼까?
CHAP0_1 다짐
혹여나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시는 스티미언분들.. 도움이 되셨을련지요?